얼마 전에 안동시에서 추진한 행사인 ‘왔니껴 안동 오일장’ 이 순조롭게 성장하여 누적 방문객 5만 명 돌파하였다는 뉴스가 있었다. "왔니껴" 인사 소리를 들으니 어릴 때 안동 인근 지역 의성에서 살았던 추억이 되살아 난다.
의문형이나 인사말 말미에 ~이껴, ~니껴를 붙이는 안동지방 특유의 강조 사투리는 의문문이 되기도 하고 인사말이나 감탄사 역할도 한다. 예를 들면, "정말이껴"를 표준말로 바꾸면 "정말입니까"가 되는데 의미는 여러 가지다.
언젠가 서울에서 차 수리를 하러 갔을 때 기술 내용을 설명하던 엔지니어에게 "정말입니까!"라고 하면서 그의 말에 대단하다는 뜻으로 감탄하면서 이야기하였는데, 그가 화를 내면서 자기를 믿지 못하느냐고 하였다. 나는 그의 말을 반복하면서 강한 긍정을 했는데, 각 지방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말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안동 지역 사람들이 오일장 시장에서 만나면 반가운 인사로 '시장에 왔습니까'의 안동 사투리로 '장에 왔니껴'라고 인사한다. 시장에 와 있는 것을 뻔히 보고 있지만 한 번 더 강조하는 '장에 왔니껴'라고 하면서 나와 만난 현재의 존재 그 자체를 반가워한다. 당연히 시장에 왔지, 논 밭에 온 것도 아닌데, 한술 더 떠 '안동 장에 왔니껴'라고 한다.
안동 장에 왔지 영주 장에 온 것은 아니다. 뻔한 이야기지만 안동 장까지 오셔서 만나다니 반갑다는 뜻이다.
하긴 뭐 예쁘게 보면 발뒤꿈치 때도 예뻐 보인다는 옛말이 있는데, 서로 어떤 마음이냐가 중요할 것이다.
아버지와 같이 식당에 같이 간 적이 그리 많지 않다. 어릴 때 기억에 남는 것은 장날에, 초등학교 수업 마치고 시장으로 곧바로 가서, 오일장 보러 오신 아버지와 장터 국수를 먹는 것이었다. 왁자지껄하던 시장 멍석 바닥에서 국수 먹던 추억은 아련하다. 시장에 가서 국수와 함께 스쳐가는 그때 그 시절 풍물이 생각나면 가끔 국수 한 그릇을 시켜본다.
옛날 국수의 맛이 지금의 국수 맛과 물론 다르겠지만 이상국 시인의 '국수가 먹고 싶다'라는 시를 읽으면, 이제는 세상 풍파가 수없이 지나간 국수가 그때의 맛에 더하기 하고 있다.
사는 일은 /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 어느 곳에선가 /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 눈물 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내가 살던 곳은 면 단위의 크지 않은 장터여서 한번은 아버지가 무슨 마음이셨는지 안동의 큰 시장까지 나가서 안동에서 유명한 문어를 먹으러 가자고 하셨다.
내륙 지방이지만 안동에서 간고등어가 유명한 줄은 알았지만 문어도 유명한 것은 그때 처음 들었다. 그러고 보니 큰 제사상에는 문어가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곤 하였고 그것이 안동에서 명물이 되어 있었다.
문어의 한자어는 글월 文에 물고기 魚로 먹물을 가진 고기여서 문을 숭상하는 유교 문화에 맞는 고기로 여겨졌다.
그래서 일명 양반 고기라 불리었고, 선비의 고장 안동에서는 문어를 귀한 음식으로 여겨서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거나 제사상에 올리게 되었다.
한편, 오징어도 문어처럼 먹물을 뿌리고 오징어포도 마찬가지로 제사상에 올라왔는데, 왜 오징어라고 불리었을까.
오징어는 물 위에 떠 있다가 날아가던 까마귀가 오징어가 죽은 줄 알고 쪼면 곧 그 까마귀를 감아 잡아가지고 물속에 들어가 먹는데, 까마귀를 해치는 도적이라는 뜻으로 오적(烏賊)이라 이름 지었다고 하며 옛 문헌에 따르면 우리말로 오중어·오증어·오적이·오직어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아버지와 같이 간 시장에 문어를 파는 곳은 선술집 같은 곳으로, 주변에 생선가게들이 즐비하고 시장 바닥에 생선 물들이 흘러 질펀한 길거리 식당이었다.
마음씨 좋게 생긴 아주머니에게 문어회 한 접시를 시켰는데, 냉장고에서 문어를 꺼내서 썰다가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 아주머니는 진창투성이 바닥에 떨어진 문어를 얼른 집어 올려서 물에 헹구어 씻더니 잘게 썰어서 접시에 내어 왔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고 접시에 올려진 문어를 안주 삼아 소주를 드셨고 나도 먹었다.
안동으로 시집가셨다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고모님 즉, 아버지 누님 생각이 많이 나셨는지 안동 장에서 그날 아버지에게서 쓸쓸한 빛이 지나가는 듯하였다.
오일 만에 한 번씩 열리는 면 단위의 장날에는 그 면에 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얼굴을 내미다시피 하였고, 가끔은 큰 시장인 안동 장으로 나오기도 하였다. 장날은 교류의 장이고, 사돈집 소식도 듣는 날이다. '남들이 장에 간다니까 거름지고 따라나선다'라는 속담도 있다.
오일장이 서는 곳마다 매일 돌아다니는 장돌뱅이들도 많았고 그 사람들이 소식꾼 노릇도 하였다.
앞집에 아저씨는 아주 먼 지역까지 소 팔러 다니다가도 우리 지역의 오일장이 되어야 한 번씩 집에 와서 머물곤 하셨다. 혹독한 한겨울 추위에도 하루도 쉬지 않고 오일마다 다섯 군데씩 돌아가는 오일장 시장을 돌아다니며 소를 팔아서 애들을 대도시에 공부시키러 보냈는데, 무리를 한 탓에 발에 동상도 걸리고 그것이 피부 암으로 번져서 결국 세상을 하직하셨다.
장날이 되면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조그마한 농산물이라도 준비하여 시장에 들고 가서 팔아서 생필품을 사 오곤 하셨고 애들 학비를 마련하여 오셨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말 그대로 풀칠하는 수준이었다.
학교 수업 마치고 집에 왔는데 부모님이 장에 가시고 계시지 않으면 허전한 그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고, 특히 어머니가 시장에 가시고 안 계시는 날에는 언제쯤 시장에서 돌아오실까 무척이나 기다려진다.
기형도 시인의 '엄마 걱정'이라는 시를 보면서 그 시절의 그리움을 흘려보낸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