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부당합병·회계부정 혐의 항소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고법 형사13부(백강진 김선희 이인수 부장판사)는 3일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행위·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함께 기소된 최지성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미전실) 실장, 김종중 전 미전실 전략팀장, 장충기 전 미전실 차장 등 나머지 피고인 13명에게도 원심과 같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비율과 합병 시점, 삼성바이오로직스(로직스)의 삼성바이오에피스(에피스)에 대한 지배력 여부 등 쟁점 사항에 대해 차례로 판단한 뒤 검사의 주장을 모두 기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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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는 이번 사건의 가장 큰 쟁점이었던 로직스의 허위공시·부정회계 의혹에 대해서는 "(바이오젠의) 콜옵션이 행사되면 로직스가 (에피스에 대한) 지배력을 잃는다는 사실이 주요 위험이라고 공시했어야 된다고 본다"면서도 "하지만 은폐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판단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보고서가 이 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조작됐다는 검찰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회장 등은 2015년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최소 비용으로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승계하고, 지배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사내 미래전략실이 추진한 각종 부정거래와 시세조종, 회계 부정 등에 관여한 혐의로 2020년 9월 기소됐다.
1심 재판부는 3년 5개월에 이르는 심리 끝에 지난해 2월 이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로써 2016년 국정농단 사태 이후 줄곧 삼성의 발목을 잡아 온 사법리스크가 사실상 해소됐다. 향후 등기이사 복귀와 인공지능(AI) 시대 대응을 위한 대형 인수합병(M&A) 등에 속도를 낼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3일 재계에 따르면 2심에서 이재용 회장에 대해 무죄 판단이 내려지면서 이 회장은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 경영 행보에 본격적으로 힘을 실을 것으로 보인다. 검찰이 상고할 수 있지만 대법원은 사실관계를 따지지 않고 법리 해석과 적용이 제대로 이뤄졌는지만 판단한다. 결국 판결이 뒤집히진 않을 것이라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이 회장은 2016년부터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휘말리면서 햇수로 10년 가까이 경영 활동에 제약을 받아왔다. 총 560일간 구속수감됐었으며, 2020년부터는 부당 합병·회계 부정 관련 혐의로 100차례가 넘도록 재판에 출석했다.
그간 글로벌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을 직접 만나며 그룹의 미래 먹거리를 찾던 이 회장은 법원이 쉬는 명절 기간을 이용하거나 재판부로부터 불출석 허가서를 받아야 해외 일정을 소화할 수 있었다. 이 기간 법정에 선 기간이 해외출장보다도 많았다.
지난 설 연휴에도 이 회장은 국내에 머물었다. 통상 명절 기간에 해외 거래선을 만나거나 해외 사업장을 점검했지만, 2심 선고기일이 임박하면서 별도의 일정을 잡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법리스크 해소로 이 회장은 당장 국내외 주요 사업장 방문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그는 지난해 1심에서 무죄가 나온 후 하루 만에 아랍에미리트(UAE)와 동남아시아 지역을 방문하며 해외 네트워킹에 나섰다.
먼저 반도체 사업에서 어려움이 지속하고 있는 만큼, 반도체 사업장 점검 행보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주력 사업인 반도체 부문이 AI 메모리 중 핵심으로 꼽히는 고대역폭메모리(HBM) 분야에서 경쟁사에 뒤처지며 수익성이 크게 악화했다. 지난해 DS부문의 연간 영업이익은 15조1000억 원으로 23조 원의 영업이익을 낸 SK하이닉스에 밀렸다.
미래 먹거리인 로봇과 바이오, 전장 사업 등도 행선지로 거론된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 휴머노이드 로봇 제조업체 레인보우로보틱스를 인수하며, 본격적인 로봇 사업 추진을 알렸다.
또 이 회장은 최근 위기극복을 위해 대규모 투자와 대형 M&A 등 신사업 발굴에도 적극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이 회장은 2심 최후 진술에서 "최근 들어서 삼성의 미래에 대한 우려가 매우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지금 저희가 맞이한 현실이 그 어느 때보다도 녹록지 않지만 어려운 상황을 반드시 극복하고 앞으로 한발 더 나아가겠다"고 말한 바 있다.
또 재계에선 이 회장이 올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등기이사로 복귀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내놓고 있다. 현재 이 회장은 4대 그룹 총수 중 유일한 미등기 임원이다. 이 회장은 2016년 10월 ‘갤럭시 노트7’ 발화사고로 삼성전자가 대내외에서 품질 논란을 겪자 임시 주주총회를 통해 등기이사를 맡으며 책임경영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듬해 '국정농단' 사건으로 구속기소 돼 2019년 10월 등기이사 재선임 없이 물러났다. 현재 국내 4대 그룹 총수 중 미등기이사는 이 회장뿐이다.
삼성전자는 임원 성과급을 자사주로 지급하겠다고 밝히는 등 책임경영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경영 실적 악화, 노사 갈등 확대 등 여러 위기를 겪고 있는 만큼, 이 회장이 등기이사로 복귀해 책임 경영을 펼칠 가능성이 높다.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준감위) 역시 이 회장의 등기이사 복귀를 수차례 언급해왔다. 등기 이사 복귀와 함께, 현재 삼성전자가 처한 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뉴삼성 비전이 선포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다만 일각에선 검찰이 대법원에 상고할 경우, 최종 판결 이후로 등기이사 복귀를 미룰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 밖에 삼성그룹 컨트롤타워 재건 논의가 본격화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비서실, 미래전략실 등으로 존재하던 삼성의 컨트롤타워 조직은 58년간 운영되다가 국정농단 사건과 함께 해체됐다. 현재는 전자 계열 사업지원태스크포스(TF)와 금융 계열의 금융경쟁력제고TF, 삼성물산 계열 종합설계시공(EPC)경쟁력강화TF가 가동되고 있다. 다만 TF 형태는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맞춘 미래 비전을 제시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특히 삼성이 위기에 봉착하면서 계열사별 조율을 위한 컨트롤타워 조직의 필요성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삼성그룹의 준법 경영을 감시하는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준감위) 이찬희 위원장도 지난해 그룹 컨트롤타워 재건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군단장의 지휘 없이 사단장들이 각개 전투에 나선다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듯이, 삼성도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이 다시 필요한 시점이 됐다”고 말했다.
재계 관계자는 "이 회장의 사법 리스크 해소로 이제는 진짜 경영에 올인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며 "전 세계가 치열한 AI 경쟁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이 회장도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삼성 미래 먹거리 찾기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