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천안에 다시 갈 일이 있어서 예전에 살던 아파트와 미용실에 가보았다. 미용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주변 공간을 확장하여 편의점이 들어서 있었다. 미용실 옛날 번호가 있어서 전화를 해 보았는데 통화가 되지 않고 없는 번호로 나온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궁금도 하였는데, 연락되지 않는 미용사 근황을 지인에게 이야기하니 별일 아니라는 듯이 "그럴 나이도 되었지" 한다. 그럴 나이가 무슨 뜻인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도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도 별로 없는 나이라는 뜻이란다. 왠지 새삼스러운 듯 기분이 묘하다.
"노년에 미용실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능력이 정말로 대단하네요." 나는 그렇게 물어보는데 빙긋이 웃을 뿐 답은 하지 않는다. 이발하는 기술과 약간의 준비만 하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미용실에는 할머니들이 가끔 보이고 주로 외국인들이 머리를 깎으러 온다. 가격도 싸고 빨리 깎아버리니 머리 깎는 숙제를 피차 간단하게 정리하여서 좋다.
천안에 근무하러 갔을 때 제2 일반 산업단지 내에는 머리 깎을 만한 이발소나 미용실을 찾기가 힘들어서 고생하다가 마침 산업단지 아파트 내에 작은 미용실을 발견하고 그 미용사를 알게 되었다.
머리 깎으러 미용실에 가면 미용사 할머니는 안경 넘어 성경을 읽고 계신다.
그 당시만 해도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고 나이 든 지인들이 생을 달리했다는 슬픈 뉴스들이 이어지던 시절이었다.
그 할머니 왈, "온 세상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기침도 마음대로 못하고 세상이 말세가 오려나" 하면서 성경 이야기한다.
"뭣이 이렇게 힘들고 죄 많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살고, 죽으면 심판도 통과해야 한다는데, 그런가요?" 내가 웃으며 물었다.
"글쎄 그것을 어찌 인간이 다 알겠는가요. 신의 뜻이 있어서 그럴 것이겠죠."
"한 60년 이상 살아보니 별놈의 인생살이 다 겪어보았고, 별 탈 없이 편안하게 살아온 사람도 많겠지마는, 온갖 풍상을 헤치다가 벌써 이 나이에 왔네요" 한다.
나이 들어 미용사일도 힘들고 이제는 하기 싫어진다고 한다.
지금도 집에는 몇 년째 거동이 불편한 남편이 있으며, 며느리는 도망가 버리고, 아직도 가족의 식사 준비를 해야 되고 손주들도 돌봐줘야 하는데 온몸이 결리고 수시로 아프고 힘들다고 한다.
일일이 이야기하기 곤란하고 밝힐 수 없어서 그렇지, 살아온 옛이야기가 얼마나 처절했던지 누구보다도 내가 더 고생했다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그저 쓴웃음만 짓는단다.
모범 인생의 표본 같아 보여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러워했던 아나운서 출신 이계진이 ‘같이 삽시다’라는 프로에 나와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라는 고백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국 여류 대표 소설가인 박완서 작가와 박경리 작가가 하던 말도 생각난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모진 세월 가고.. 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작가가 그랬듯이 박완서 작가가 남긴 글도 비슷하다.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살아오면서 볼꼴 못 볼 꼴 충분히 봤다. 한번 본거 두 번 보고 싶지 않다.
한 겹 두 겹 책임을 벗고 가벼워지는 느낌을 음미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특히 박완서 작가는 일찍 남편을 잃자마자 곧바로 3개월 뒤에 자신의 전부 같았던 아들을 비명횡사로 떠나보내고 그 슬픔이 너무나 컸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박완서 작가는 "주여, 한 말씀만 하소서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견뎌야 하는지"라고 쓴 글도 있다. 무슨 영화를 얼마나 보려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너무 고통스러웠으리라.
'서른 잔치는 끝났다', '선운사에서'로 유명한 최영미 시인의 말이 인상적이다.
"나는 TV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내 인생이 어느 드라마보다도 극적이어서 웬만한 것은 따분해서 견딜 수가 없다."
행복이란 것은 역설적으로 고통이 있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이라, 고통을 모르면 행복도 모른다고 한다.
'아픈 만큼 행복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아픔도 주지 마세요' 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질병도 상처도 치료가 되기까지는 아픔이 수반되고, 나을 때까지는 당연히 참아내야 하는 것이다.
세상만사 지속적으로 바뀌어 가므로 일희일비하며 너무 기뻐하거나 너무 슬퍼할 것도 없다지만, 실제 사는 일이란 그런가. 생각할수록 복잡한 삶이라도 종국에는 단순하게 정리된다.
모든 시간을 돌아보는 시간이 오게 되면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이 "참을걸, 베풀걸, 즐길걸"이라고 한다.
생각 외로 간단하게 딱 세 가지로 요약이다.
나 역시도 생각만큼 행동이 잘되지 않는 것이지만,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가까운 사람에게 미안해할 줄 알고, 고마워하고, 사랑하며 즐겁게 살자는 이야기다.
알고 보면 인간은 누구나 불쌍하다. 생로병사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사랑도 미움도 자기만의 고통이 있다.
그렇지만, 만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그저 웃을 줄 아는 사람이 현명하다.
소소한 만족을 반복하는 기쁨이 큰 행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