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이 지나고 어버이날이 다가오면, 부모님을 뵙거나 안부를 전하는 발걸음이 분주해진다. 매년 반복되는 이 날들은 자연스레 부모님과의 기억을 불러낸다.
학창 시절, 어린이날은 쉬는 날이었지만, 농사를 짓던 부모님을 따라 고추를 심으러 가는 날이기도 했다. 넓은 산비탈 밭에 모종을 심고, 포기마다 물을 길어다 주는 일은 온종일 이어지는 고된 노동이었다. 아버지의 거친 손이 흙을 다질 때, 나는 그 손끝에 깃든 삶의 무게를 어렴풋이 느꼈다.
이제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영천 호국원 묘비 앞에서 가끔 인사를 드린다.[*1]
국립 호국원에 들어서면, 바람 소리마저 멈춘 듯한 고요 속에 묘비에 새겨진 이름들이 마음 깊숙이 울려온다. 1930년 전후에 태어나 6·25 전쟁의 포화를 겪은 이들이다. 최근에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이름들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그들은 치열했던 세월을 지나, 이제는 호국원의 작은 아파트 같은 안치실에 층층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름은 세월 속에 희미해지지만, 그들의 헌신은 여전히 살아 숨 쉰다.
영천 국립호국원
호국원의 고요함을 뒤로하고 돌아오면, 부모님 세대의 흔적이 점점 더 사라져 가는 것이 느껴진다. 손때 묻은 소반, 빛바랜 흑백사진, 꾹꾹 눌러쓴 손 편지들.
한때 가정의 중심이던 그것들은 어느새 낡은 골방 구석으로 밀려나거나, 폐기물처럼 버려진다.
얼마 전, 의성 산불로 집을 잃은 지인은 조상 대대로 간직해오던 생활용품과 옛 문서, 족보, 사진첩이 모두 타버린 것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 물건들이 부모님의 숨결이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잿더미가 됐어요.”
그의 말은 상실의 무게를 담담히 전했다.
젊은 시절, 파주에 살며 박달산과 앵무봉을 오르던 때가 떠오른다. 붉은 흙이 깔린 산길을 걸을 때마다, 수많은 젊은 피가 이 땅을 적셨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가끔 6·25 전쟁의 흔적이 발굴된 현장을 본 적이 있다. 탄피, 안경, 수통, 그리고 이름 모를 군인의 뼈.
그들은 한때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형제였으며, 아버지였다. 그러나 이제는 흙 속에서도 잊혀 간다.
사라지는 것은 물건이나 사람만이 아니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웃음소리를 나누던 뒷골목은 이제 고층 아파트와 빌딩으로 바뀌었다. 그 거리의 냄새, 사람들, 함께 보낸 시간은 이제 기억 속에서만 살아 있다.
촛불 하나를 켜면 세상이 잠시 환해지지만, 바람 한 줄기에 이내 꺼지고 만다. 작은 촛불 하나가 세상을 비추다 꺼져가는 모습은 마치 생명이 왔다가 가는 듯하다.
부모님 세대, 그들이 사랑했던 세상도 그렇게 서서히 잊혀 간다.
“살다 보면,
많은 것들이 사라진단다.
변하기도 하고,
휙 지나가 버리지…
단 한 가지만 빼고 말이야.”
-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그 한 가지는 아마도 사랑과 기억, 세대를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끈일 것이다.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가사처럼, 그 시절의 낭만은 도라지나 위스키 한 방울조차 들어가지 않은 가짜 위스키를 마시면서도, 진짜로 삶을 사랑했던 그들의 마음에 있었다.
그 마음은 오늘도 우리 안에 살아 있다.
사라짐은 슬픔을 주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의 전조이기도 하다. 촛불이 꺼지면 어둠이 찾아오지만, 새 아침은 또 다른 빛을 가져온다.
부모님 세대가 떠난 자리에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키우고, 그 생명들은 또 다른 세대를 이어간다.
그들의 손때 묻은 가치를 이어받아,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사랑과 헌신을 전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부모님 세대가 남기고 싶었던 말은, 아마 이것이었으리라.
“너희의 시대를 사랑하라.
그리고 너희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라.”
[*1]: 국립 호국원은 경북 영천시, 전북 임실군, 충북 괴산군, 경기 이천시, 경남 산청군, 제주시 등 6곳에 있으며, 2028년과 2029년에 각각 강원 횡성군과 전남 장흥군에 추가로 조성된다. 6·25 전쟁 및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 국가유공자, 장기복무 제대군인, 그리고 올해부터 30년 이상 재직 후 정년퇴직한 경찰·소방공무원이 안장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