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변을 걷다 보면 문득 시야를 가득 채우는 꽃이 있다. 노란 금계국. 햇살을 머금은 듯한 그 빛은 따뜻하고 생기롭다. 코스모스를 닮은 그 꽃들은 늦은 봄부터 여름까지 도로를 따라 줄지어 피어나며, 잠시 발길을 멈추게 한다. 노란색은 언제나 희망의 색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우리 삶도, 그 색을 닮고 싶어 하는지 모른다. 어둠 속에서도 환한 빛을 찾고, 그 빛으로 누군가의 하루를 덥혀주는 삶을.
금계국과의 첫 만남은 십여 년 전, 어느 여름날이었다. 도로변에 소박하게 피어 있던 노란 꽃들이 마음에 들어, 몇 포기를 뽑아 어머니 산소 가장자리에 심었다. 꽃이 활짝 피었을 때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노란 꽃잎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마치 어머니가 나를 맞아주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위로가 꽃처럼 피어나는 순간들이었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추석 무렵 벌초를 위해 다시 찾은 산소는, 더 이상 잔디밭이 아니었다. 금계국이 무성하게 자라 산소 안까지 깊숙이 침범해 있었다. 당혹스러움을 넘어, 죄책감이 밀려왔다. 예쁘다고 믿었던 선택이 어머니의 안식처를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금계국을 뿌리째 뽑아냈다. 씨앗이 흩날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산소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려 애썼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찾아간 그곳은 주변에서 날아온 씨앗으로 또다시 금계국으로 뒤덮여 있었다. 생명력은 끈질기고 완강했다. 마치 내 실수를 조롱하듯, 그 노란 꽃들은 더 넓은 영역으로 번져 있었다.
잠시, 잔디를 포기하고 금계국으로 산소를 덮을까 고민도 했다. 그러나 꽃은 피고 지기 마련이다. 꽃잎이 지고 나면, 남는 것은 지저분하게 엉켜 있는 줄기와 씨앗뿐이었다. 화려함은 순식간이었고, 그 뒷자락은 어수선하고 무거웠다. 아름다움은 잠깐, 그러나 그림자는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야 들은 이야기. 금계국, 그중에서도 ‘큰금계국’은 생태 교란종으로 분류된다고 했다. 씨앗뿐 아니라 뿌리로도 번식하며, 주변의 식물들을 밀어내고 자신만 살아남는다. 무심코 "예쁘다"라고 여겼던 꽃이, 알고 보니 생태계를 어지럽히는 존재였다. 겉으로 보기엔 환한 미소 같지만, 그 속엔 이기적인 생존의 의지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어쩌면 세상에도 그런 존재가 많을 것이다. 화려한 겉모습에 속아 우리가 초대한 무언가. 그리고 그로 인해 조용히 무너지는 질서들.
어머니의 산소는 이제 아버지와 함께 국립묘지로 옮겨졌다. 하지만 금계국의 생명력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선연하다. 잡초의 세계에서도 으뜸일 그 강인함은, 때로 경외감마저 안긴다. 처음엔 예뻐서 심었지만, 결국 그 꽃에게 지고 말았다. 희망이라 믿었던 선택은, 뒤늦게 후회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삶에서도 그런 만남이 있다. 찬란했던 관계는 시들고 나면 지저분한 흔적만을 남기고, 처음의 반짝임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다. 때론 잘못된 선택이 인생을 흔들고, 우리는 누군가를 탓하며 분노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알게 된다. 모든 만남과 선택에는 나의 몫이 있다는 것을. 옛사람들이 “복도 지지리 없지”라며 운명을 탓할 때, 나는 ‘내 탓이오’라는 기도를 되뇌며 마음을 다잡는다. 나를 탓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로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
'전화위복'이라고 과거에 나빴던 것이 나중에는 되려 복이 될 수도 있다.
금계국은 여전히 도로변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누군가의 눈엔 그저 아름다운 꽃일 테고, 또 누군가는 예전의 나처럼 그 꽃을 정원에 심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예쁘게만 보이는 것들 뒤에는 때로 감당해야 할 진실이 숨어 있다. 그 노란빛을 오래 바라본 나는, 이제 그 이면의 그림자까지 함께 본다. 그 꽃은 내게 오래도록 말을 걸어오는 존재다. 찬란함은 늘 대가를 요구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