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회 청룡영화상을 끝으로 30년간의 진행 마무리
누구보다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배우로서 최고의 필모를 써온 배우 김혜수, 그녀를 수식하는 또 다른 시그니처가 있다면 바로 ‘청룡여신’이다.
30년동안 청룡영화상 진행자로서 한국영화와 배우들의 최고 영광의 순간들에 함께하며 청룡영화상의 품격을 지켜온 그녀가 마지막 진행을 끝냈다.
25일 오후 KBS홀에서 열린 제44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의 실제 주인공은 수상을 한 배우도 감독도 작품도 아니었다. 30년 대장정을 멋지게 마무리하고 최고의 해피엔딩 작품을 만든 김혜수였다.
1993년부터 2023년까지 이어온 청룡의 사회자 자리를 지키며 영광의 순간에 함께 울고 웃어온 김혜수가 어제 44회를 끝으로 물러났다.
청룡영화상하면 김혜수였기에 그녀의 고품격 진행을 못 보게되는 배우와 영화팬들의 아쉬움은 엄청 나다. 특유의 부드러움과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진행은 또렷하고 차분한 목소리는 늘 최고였지만 이날의 마지막 진행은 더더욱 그녀만의 장점이 부각된 진행이었다. 상대 MC 인 유연석과는 조화롭게 앙상블을 이뤘고, 늘 그래왔듯이 긴장으로 수상소감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수상배우에게는 영화계 선배이자 동료로서 따스한 격려의 말을 전하며 끝까지 마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날 시상식의 카메라의 앵글은 대각선 구도가 많았다. 그 덕분에 MC와 수상자들이 한 화면에 여러 차례 담겼다. 이 앵글은 김혜수가 선배, 후배, 동료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담기에 최적이었다.
청룡의 여신으로 30년의 시간을 함께한 그녀의 마지막을 위한 엔딩크레딧이 이날 시상식의 화룡점정이었다.
시상식의 마지막 순서인 최우수작품상 수상무대가 끝내자 동료배우인 정우성이 김혜수를 떠나보내는 의미 있는 자리에 깜짝 등장했다. 그는 "30년이란 시간 동안 청룡영화상을 이끌어 온 김혜수라는 사람을 어떻게 하나의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김혜수가 영화인들에게 주었던 응원, 영화인들이 김혜수를 통해 얻었던 위로와 지지, 영화인과 영화를 향한 김혜수의 뜨거운 애정이 있었기에 지금 이 자리의 청룡영화상이 있을 수 있었다"고 영화인, 관객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시청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말을 건넸다.
이어 "그녀가 함께한 청룡영화상의 30년은 청룡영화상이 곧 김혜수이고 김혜수가 곧 청룡영화상인 시간이었다. 영원한 청룡의 여인 김혜수에게 청룡영화상이란 이름이 적힌 트로피를 전한다"고 말하며 청룡이 준비한 감사패를 건넸다. 객석에 자리한 영화인들은 전원 기립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정우성의 말처럼 트로피에는 상의 종류가 아닌 시상식 타이틀인 '청룡영화상'이 쓰여있었다. 청룡의 트로피가 연상되는 황금빛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마이크 앞에 선 김혜수는 지난 31년의 '영화로운 순간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김혜수는 "언제나 그 순간이 있죠. 바로 지금이 그 순간인 것 같아요. 일이건 관계건 떠나보낼 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다시 돌아가도 그 순간만큼 열정을 다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지난 시간들에 후회 없이 충실했다 자부합니다"라고 말했다.
김혜수는 "우리 영화의 동향을 알고 그 지향점을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청룡영화상과의 인연이 30회나 됐다"면서 "한편 한편 너무나 소중한 우리 영화, 그리고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제게도 이 자리는 배우로서 성장하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자리가 됐다. 우리 영화가 얼마나 독자적이고 소중한지, 진정한 영화인의 연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매년 생생하고 감동적인 수상 소감을 들으면서 배우들과 영화 관계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배웠다"고 영화인으로서 본 청룡영화상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어 "'배우 김혜수'의 서사에 청룡 영화상이 함께했음에 감사하고 자부심을 느낀다"면서 개인적인 의미도 부여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청룡영화상이 많은 분들과 함께 영화를 나누고 마음껏 사랑하는 시상식으로 존재하길 바란다"고 시상식의 미래를 향한 덕담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매년 청룡영화상과 함께 저를 떠올려 주신 모든 분들과 그동안 보내주신 박수에 감사드린다. 앞으로 청룡영화상의 진행자가 아닌 저로 여러분을 만나게 될 제가 조금은 낯설더라도 이제는 매년 생방송 진행의 부담을 내려놓고 22세 이후로 시상식 없는 연말을 맞이할 저 김혜수도 따뜻하게 바라봐 달라. 1993년부터 지금까지 저와 늘 함께 했던 청룡영화상,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한 이 모든 순간이 유의미했고 저에겐 큰 영광이었다. 고맙다"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충무로의 젊은 스타였던 배우는 31년이 흘러 대한민국 영화계를 따뜻하게 보듬는 진정한 여신이 되어 동료, 후배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됐다. 이날 수상한 배우들 이병헌, 조인성, 정유미는 물론 한지민 이성민 탕웨이 등 시상하러 온 배우들도 김혜수에게 감사와 고마움을 전했다.
김혜수의 말대로 '배우 김혜수'의 서사에는 청룡영화상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청룡영화상의 서사'에도 김혜수가 크게 자리한다.
앞서 시작한 영화 시상식이 공정성 논란에 휩싸여 대중과 영화계의 인정을 받지 못할 때 청룡은 김혜수가 굳건히 지키며 한국의 대표 영화 시상식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진행 초기에는 김혜수의 진행보다는 의상이 더 화제가 되며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김혜수가 가진 어느 전문 진행자도 흉내 낼 수 없는 당당함과 품격 그리고 영화의 가치를 전달하고, 영화인의 자존감을 높이는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는 모습은 청룡영화제가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시상식이 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코리안 뉴웨이브부터 한국영화 르네상스까지 한국영화의 부흥기에도 김혜수는 청룡의 안방마님이었고, 코로나19 이후 계속된 한국 영화의 위기 속에서도 김혜수는 청룡을 지켰다. 그렇게 44년의 역사가 이어졌다.
무엇보다 이날 30년의 진행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 김혜수는 떠나며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축하무대에 오른 박진영과 디스코를 추며 마지막 진행을 자축했다. 그야말로 ‘김혜수’다운 엔딩이었다. 이제 청룡영화상의 호스트에서 게스트로 바뀌는 김혜수의 제45회 청룡영화상을 기대해 본다